그루브(?) 한 투쟁을 강요하는 사회

“그루브(?)"한 투쟁을 강요하는 사회

이원재 / 문화운동가

얼마 전 한 영화 주간지가 홍대지역의 클럽문화를 다룬 기사를 보았다. ‘홍대앞 클럽문화의 진보적 가능성’과 ‘이식된 서구 중심적 클럽문화의 상품성’ 사이에서 고민하던 기자는 홍대앞의 클럽문화를 이렇게 정의했다. 아니 이렇게 충고했다.(그 기사의 부제가 ‘클럽문화의 발전을 위한 제언’이었으니)

"그냥 그루브하라”

기자가 어설프게 의미화 해버린 클럽문화의 ‘진보적 가능성’이 현실에 존재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그루브”(groove)하게 사는 것조차 쉽게 용납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문화 환경 때문이리라. 대중문화의 두께가 쌓이고, 다양한 지형의 문화정치가 생성되기 이전에, 노는 것조차 맘대로 할 수 없는, 그래서 “그루브한 투쟁”이라는 역설을 끊임없이 탄생시키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유교적 가부장제, 나이주의, 가족주의, 국가주의 등이 집약된 청소년 보호업자들의 문화적 보수주의가 거대한 사회적 금기를 재생산하며 사회를 통제하는 동안, 솔직한(!) 그루브함은 역설적으로 진보적 가능성을 획득해 왔다. “이 사회는 나의 즐거움에 결코 관대하지 않다”는, “즐겁기 위해서는 싸울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은 결코 많은 시간과 경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얼마전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의 한 클럽에서는 “타투 합법화를 위한” 세 번째 파티가 열렸다. 레이브 파티라고 하기에는 압구정동의 로데로거리가, 합법화 투쟁이라고 하기에는 그 화려한 조명 아래의 춤과 랩과 배틀이, 운동의제라고 하기에는 타투라는 것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거기에서는 터무니없는 사회적 억지에 대한 또 하나의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맥주병을 한 손에 쥔 채 건들거리는 MC, B-Boy, DJ 그리고 클러버와 구경꾼… 클럽에 모인 이들은 그냥 그루브할 뿐이지만, 그 그루브함은 한 타투이스트에 대한 사회적 폭력과 문화적 차별에 반대하며 싸우고 있었다. 누구나 대낮에 TV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문신을 결코 법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사회적 억지, 그 억지 뒤에 숨어있는 문화적 보수주의와 파시즘에 대해서 그들은 스스로의 스타일로 저항하고 있었다.

문신 합법화를 위한 파티를 민주사회를 위해 만들어진 변호사들의 모임이 후원하고, 테크노 클럽의 클러버 모임이 주관하고, 문화운동가가 구경하며 밤새 파티 농성을 진행하는 사회. 유교적 가부장제와 국가주의적 파시즘으로 똘똘 뭉친 청소년 보호업자들이 준 선물인 셈이다. “네 몸에 그림은 물론 낙서(차카게 살자?)를 할지라도 국가와 어르신들의 허락을 받으라"며.

대한민국, 얼마나 “그루~브하고 다이나~믹하며 스~릴있는” 사회인가! [문화사회]

——————————

뭔가 한 마디 붙여 보려고 했는데
딱히 생각나지가 않는군요.

정말 그냥 ‘그루브’하게 살아보자.